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로스 2세 (문단 편집) ==== 외치 ==== 테오도로스 집권 시기, [[이슬람]] 세력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니케아 제국을 위협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테오도로스는 이슬람 세력을 걱정할 필요 없이 [[불가리아 제2제국|불가리아 제국]]과 [[라틴 제국]] 전선에 집중했다. 먼저 불가리아 제국의 경우, 그는 [[1255년]]부터 [[1256년]]까지의 원정을 개시해 강화 조약을 유도했다. 1256년 불가리아 [[차르]] 미하일 아센이 살해되고 이듬해에 [[콘스탄틴 티흐]]라는 귀족이 차르 자리를 계승한 뒤 테오도로스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자,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또한 요안니스 바타체스의 딸 마리아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군주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들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와의 결혼을 성사시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의 대립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런데 테오도로스는 이피로스와의 결혼 협상 도중 막바지에 결혼 조건으로 [[두라초]]와 세르비아를 요구했다. 이에 미하일 2세는 격분하여 [[테살로니키]] 공격을 준비했고 그의 선동으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도 그를 지지하고 나섰으며 [[마케도니아]]도 며칠 뒤에 가담했다. 신하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미하일 8세|미하일 팔레올로고스]]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테오도로스는 그를 싫어했고 이미 1256년 초에 그에게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이때문에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룸 술탄국]] 측으로 피신해서 [[술탄]]의 [[기독교도]] [[용병]]들을 지휘하여 [[몽골 제국군|몽골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로스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받고 소수 병력을 맡겼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소규모의 병력으로도 용감히 싸워 두라초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피로스의 공세를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하일은 이피로스군이 테살로니카의 성문에 이르는 걸 허용했다는 이유로 [[니케아]]에 소환되어 [[파문]]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